DPI 연구

북한의 인권은 정치적으로 예민한 사안이다. 군사적으로 대립 중인 상황에서 이 문제를 남한 정부의 당국자가 거론하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다른 나라 정부나 국제기구는 자신의 입장을 표명하는 데 자유롭다. 십수 년 전 북한에 흉년과 홍수가 겹쳐 극심한 식량난을 겪었을 때 외신 등에 보도되는 깡마른 어린아이들의 모습은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국내외 시민단체들은 구호 식량을 더 보내려 노력했는데 미국 정부가 이를 적극 지지하지 않았다. 당시 미국에는 북한 문제를 다루는 인권위원회가 있었는데 이들의 입장은 단호했다. 구호물자의 상당 부분이 당 간부의 주머니로 가거나 북한군 식량으로 사용된다는 취지였다. 

마침 이 인권위원회 위원장이 서울에 와서 토론회를 열었다. 토론자로 참가한 국내 학자들은 나만 빼고 모두 정치학 전공이었다. 북한 정부의 구호물자 유용에 관한 이 분의 생각은 예상보다 강경했는데, 북한 전문가도 아닌 내가 어쭙잖은 얘기를 하기보다는 가벼운 반론이라도 펴보자는 심정으로 북한의 암시장 얘기를 꺼냈다. 

“암시장에 거래되는 물품의 일부는 당 간부들로부터 나온다. 예를 들어 구호물자로 간 쌀 열 가마니를 당 간부들이 착복했다 하더라도 그 대부분은 암시장에 나올 것이다. 공급이 늘면 가격이 떨어지는 것이 시장원리이다. 인도적으로 제공된 쌀 중 그래도 일부는 구호품으로 쓰일 것이고, 나머지의 경우도 낮아진 쌀 가격의 형태로 북한 주민에 도움을 줄 수 있다. 구호 물품 전달 과정의 감시 체제를 강화하는 조치는 바람직하지만 인도적 지원까지 제한하며 북한을 압박하는 것은 최선의 정책 같아 보이지 않는다.”

발표자는 이 무슨 황당무계한 논리냐고 뻔히 쳐다봤고, 나 역시 실증적 증거 없는 개인적 추론일 뿐이라고 마무리했다. 그런데 다음날 어느 신문에 내 발언이 제법 크게 보도됐다. 맞는 말보다는 이상한 말을 보도하고 싶은 것이 언론의 생리라 여기고 웃고 넘어갔지만 이후 진보 정치인들로부터 격려 전화까지 받는 촌극이 있었다. 전문가일수록 잘 모르는 사안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어야 한다는 평소의 원칙에 어긋난 일이어서 후회를 많이 했다. 

어느 나라나 지하경제, 암시장, 그림자 경제 등으로 불리는 비공식 부문(informal sector)이 있다. 기록이 남지 않는 현금으로 거래가 이루어지기 때문에 현금 경제(cash economy)라 부르기도 한다. 예를 들어 누가 내 돈을 빌려 가 갚지 않을 때 두 가지 해결 방법이 있다. 하나는 법에 의존하는 방식인데, 만일 변호사를 고용했다면 그에게 지불하는 수임료는 공식 부문의 거래 기록인 국내총생산(GDP)에 포함된다. 다른 방식은 전봇대에 붙어있는 전단지를 보고 해결사를 고용하는 것이다. 그에게 지불하는 비용은 변호사 수임료보다는 쌀 것이다. 대신 현금을 사용하게 될 텐데 이는 공식 기록에 남지 않는다. 

그럼 이 두 경우에 어떤 다른 차이가 있을까. 경제학자의 시선에서 보면 두 경우 모두 수요, 공급, 가격이 존재하는 시장 거래이다. 다만 현금 거래의 경우 정보를 확보하기 어렵기 때문에 세금을 매기기 어렵다. 일반인의 시선에서 보면 어차피 목적은 동일한 거래인 반면, 해결사 방식은 좀 불안할 수 있다. 선금을 주었는데 그냥 떼일 수도 있고, 해결한 뒤에 돈을 더 달라고 할 수도 있다. 거래 보호 장치가 없기 때문에 위험 부담이 큰 것이다. 가격이 싼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공식 부문의 시장이라고 완벽한 것은 아니다. 독과점 같은 불완전 경쟁 시장에서는 소비자 후생이 줄어들 수 있고, 공해 같이 시장 밖의 요인이 시장 참여자에게 영향을 주면 사회적 비효율이 발생한다. 이 외에도 공공재에 대한 무임승차나 불완전한 정보 등 시장실패(market failure)의 사례는 다양하다. 이런 경우 정부가 시장에 개입해 비효율을 제거할 수 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시장 자체가 좀 더 잘 돌아가게 시장 제도를 튼튼하게 만드는 것도 정부의 몫이다. 

이처럼 공식 부문의 정상적인 시장과 비공식 부문인 암시장을 구분하는 결정적 요소는 정부의 보호막이 존재하느냐 여부이다. 북한의 암시장도 시장이라 말할 수 있지만 시장의 거래질서를 유지하고 참여자를 보호할 장치가 없기 때문에 비효율과 불공평이 만연해 있을 것이라 예상할 수 있다. 그렇다고 이를 자본주의 체제의 암시장과 같은 수준으로 놓기도 그렇다. 정상 시장과 암시장이 공존하는 일반적인 경우에는 양자 간의 거래가 이루어진다. 또한, 정부가 나서 비공식 부문의 경제 활동을 공식 부문으로 이전시키려 노력한다. 그래야 거래 질서가 투명해지고 정부의 조세 수입도 늘어나기 때문이다.

북한의 암시장이 특이한 것은 이곳이 수요와 공급에 의해 가격이 결정되는 유일한 시장이라는 점이다. 공산 국가의 공식 부문은 시장 경제가 아니라 배급을 원칙으로 하는 계획 경제이다. 선험적으로는 시장경제와 계획경제 중 어느 쪽이 더 효율적으로 국가 자원을 배분할 수 있는지 말하기 어렵다.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시장보다 현명한 정부 기구의 계획적 자원배분이 우월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적어도 미국과 구소련이 대립했던 2차 대전 직후의 상황에서는 이런 질문에 대한 대답이 가능할 정도의 실증 사례도 찾기 어려웠다. 그러나 1945년부터 1991년까지 지속된 냉전 시기 동안 남한과 북한, 서독과 동독의 경제력 차이가 벌어졌고 급기야 물자 부족 등 배급체제의 온갖 부작용에 시달리던 구소련의 해체와 함께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우월성이 경험적으로 입증됐다 볼 수 있다. 

정확한 통계를 알기는 어렵지만 북한 암시장의 규모는 매우 클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공식적으로 보도되는 통계만으로 북한 경제를 가늠하기는 어렵다. 다만 공식 부문인 배급체제나 비공식 부문인 암시장이나 일반 서민보다는 권력에 가까운 집단에게 유리한 식으로 명시적, 암묵적 규칙이 정립되어 있을 것이라 예상하기는 어렵지 않다. 정상적인 시장경제라 하더라도 독과점과 같은 좁은 의미의 시장실패와 경제위기와 같은 넓은 의미의 시장실패 모두 저소득 계층에 더 불리한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높다. 북한의 암시장은 매우 특수하고 지속적인 형태의 시장실패가 상존하는 시장경제라 해석할 수 있다. 문제는 이것을 시정할 제도적 장치가 없다는 것이다.